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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대창리당간지주
양변에 장식 수법으로 모[角]를 죽였으며 화강 석재로 만들어진 통일신라 시대의 당간지주
소개
1963년 1월 21일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높이 5.1m. 화강 석재.2개의 지주가 원래의 위치와 형상대로 1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이 주변에서 간혹 기왓조각 등이 수집되어 일대가 절터임을 알 수 있으나 전하는 사적은 없다. 마주 보는 내면과 외면, 전·후면에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으나, 외면의 양변은 모[角]를 죽인 약간의 장식수법이 보인다.
관광가이드
현재 당간을 받치던 대석과 기단부의 돌이 없어졌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기저부에 직사각형의 지대석을 구축한 점으로 보아 기단부도 직사각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내면의 간구 이외에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 간결한 양식이라든지 소박하고 견실한 전체의 수법이 망덕사지 당간지주(望德寺址幢竿支柱:보물 69)와 거의 같아 조성 연대도 이와 비슷한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관광팁
대창리 당간지주는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1m의 간격을 두고 두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지주 사이의 깃대를 받치던 받침이나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바닥 부분에 직사각형의 돌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기단부 또한 직사각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조각한 흔적이 없는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깃대#당간지주#8세기경#망덕사지#당간#모[角]#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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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신복사지
범일 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복 사의 절터
소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 사지는 통일신라 때 범일 국사가 창건한 신복 사의 절터이다. 건물터들의 배치 양식과 남아있는 보살상의 양식을 통해 고려 초기의 양식으로 추정되며 당시 강원특별자치도 영동 지방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절터에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와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이 남아있다.
관광가이드
삼면이 키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크지 않은 절터 안에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3층 석탑과 보살상이 있다. 절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옛 절터에서 천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한 곳만 바라보며 자리를 지켜온 보살상을 보고 있으면 경건함과 함께 어떻게 사라졌을지 모를 신복 사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 떠오른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탑과 보살상이 만들어지던 때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을 권한다.
관광팁
신복사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강릉 시내에서 내곡동의 관동대학교 방향으로 가다 강릉시 보건소에 못미쳐 좌측으로 진입하는 작은 길로 들어선다. 이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곡간 사이에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주변 일대가 신복사지이다. 수많은 옛 절터들이 있지만 신복 사지의 3층 석탑과 보살상은 꽤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당시 유행하던 양식을 알 수 있다. 미리 시대별 보살상과 탑의 양식을 공부하고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을 감상한다면 더욱 의미가 깊은 신복사지 관광이 될 것이다.
#조각#삼층석탑#석조보살좌상#석탑#보물#절터#고려#보살상#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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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강릉초당동유적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선사유물지
소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신라 통일전쟁기 전후의 고분군 유적이다.
관광가이드
강릉 해변의 초당동 일대에 산재되어 있으며, 그 중 1기가 1969년의 정지작업 중 발견되어 긴급 조사되었다. 강릉 초당동 일대는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를 통하여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분유적이 함께 분포하는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다. (1993년 이후 강릉대학교 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약 27차례에 걸쳐 발굴 및 시굴조사)
관광팁
2007년 12월 3일 국가유산으로 59,290㎡ 에 이르는 유적이다. 중요한 매장유산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 유적 및 고분 유적이 함께 분포하고 있다.초당동의 주택부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대형 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槨墓)에서는 금동제 호접형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마구류, 철검, 철촉 등이 출토되었다.이 외에 초당동 주변의 하시동 등지에서 발견된 같은 형태의 돌방무덤에서는 굽다리접시, 귀달린 사발, 철칼, 청동 말방울, 금동관, 환두대도 등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또 근처에 있는 안인리에서 삼국시대 전기의 대형취락이 발견된 예로 보아 이 지역은 일찍이 실직국(悉直國)과 같은 독자적인 집단이 형성되어오다가, 후일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유적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에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사실 및 당시 강릉 지역의 지정학적 위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구조는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의 돌방무덤[石室墳]이다. 동벽은 파괴되어 동서의 장축길이는 알 수 없었으나 남은 부분의 길이는 4.5m였다. 너비는 바닥이 넓고(1.4m) 천장이 좁은(97㎝)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었다. 평면도 전체적으로 보면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 사다리꼴이었다.발굴 당시에는 길이 2.15m, 너비 1.3m, 두께 30㎝의 화강암으로 된 한 개의 뚜껑돌[蓋石]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었다. 바닥은 사람 주먹만한 자갈을 한 벌 깔았고 그 사이는 모래로 채웠다. 유물은 주로 돌방 안의 서쪽에서 토기·철제무기·말갖춤[馬具] 등이 발견되었다. 입구나 널길의 흔적은 없었다.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온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분들이 분포하는 곳으로 신라시대 고분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고분에서는 금동제 나비모양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등이 발견된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지이다.특히 2005년 5월∼6월에 강원특별자치도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초당동 84-2번지 주택신축부지에서 확인된 신라시대 수혈식 석곽묘는 주·부곽이 달린 독특한 장법의 대형분으로 금동제 호접형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마구류, 철검, 철촉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는 삼국시대 당시 강릉지역의 토착세력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삼국시대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등 강릉지역의 지정학적 위상과 관련하여 학술적·문화재적 연구에 가치가 있다. 유적의 보호 차원에서 팬스가 가로막혀 가까운 접근은 어려워도, 출토되어 있던 부분을 커다란 돌로 덮어 놓아 유물이 출토된 곳을 확인할 수 있다.그리고 한 쪽에는 어르신들과 마을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마련되어, 다소 조심스러운 유적을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함이 엿 보인다.초당동 유적지에서 역사의 향취도 느껴보고, 초당동의 명물인 초당 순두부와 짬뽕순두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도 둘러보면 의미 있는 문화유산답사가 될 것이다.
#신라#해변#고분유적#발굴#사적#철검#고분#석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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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수문리당간지주
유려한 선과 소박한 인상을 지닌 당간지주
소개
1963년 1월 21일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높이 3.7m인 2개의 지주가 1m 간격으로 동서에서 마주 보고 있다. 마주 보는 내면·외면·전·후면에 별다른 조각이 없는 간소한 형식을 취하였으나 양 지주의 머리 부분은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반원을 그리며 깎여 내려와 앞과 뒤쪽에서 보면 4 분원 모양이며 그 선이 매우 유려하다. 양 지주의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깝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좁아졌으나 큰 차이는 없다.
관광가이드
수문리 당간지주의 당간을 고정하는 간(杆)은 내면 상단에 직사각형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상부에만 설치하였다. 각 면의 돌을 다룬 솜씨는 정교하지 못하고 아무런 조각장식도 없어 당간지주로서는 세련되지는 않다. 그러나 상부의 간 구멍이나 반원의 기둥머리는 통일신라 시대의 조성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견실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동쪽 지주의 남측 면에는 해서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1817년에 다시 세워졌음을 나타낸다.
관광팁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 마주 보는 내측 면과 외면, 앞뒷면에 별다른 조식이 없는 간소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간결한 특징을 보인다. 당간은 사실 흔한 유물이 아니다. 깃대이기 때문에 주 재질이 나무라서 그렇다. 다만 문헌이나 소량 남은 유물을 통해 당간의 윗부분엔 용을 새기거나 삼지창을 올려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당간지주는 재질이 돌이기에 꽤 많이 남아 있다. 강릉만 해도 대창리, 수문리, 굴산사지 이렇게 세 군데에 남아있다.
#보물#당간지주#당간#통일신라#지주#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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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구산서낭당
국사 성황신을 처음 모시는 유형 전승 시설물
소개
구산 서낭당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유적이다. 매년 음력 4월 15일 대관령 국사 성황제를 마치고 국사 성황 행차가 대관령 국사 여성황사로 가기 전 잠시 머물러 굿을 하고 제례를 하는 곳이다.
관광가이드
구산 서낭당은 약 300여 년 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당집은 약 10여 년 전에 새로 건립되었고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쳐 있다. 구산서낭당의 특징은 다른 서낭당에 있는 성황지신, 토지 시신, 여역지신 외에 영산 지신이 있다는 것이다. 영산 지신이 있는 이유는 앞산이 영신재인데 개발로 인해 영산 신에 갈 곳이 없어 함께 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팁
구산 서낭당은 주변 공간이 좁고 진입로가 없어 구산 서낭제를 지낼 때마다 큰 불편을 겪어왔다. 이에 강릉시는 구산서낭당 주변의 토지 1,213㎡를 매입, 공원과 주차공간을 조성해 단오제 전승 기반을 갖추는 한편 단오 관련 유적지를 활용한 관광객 유치 등 연중 단오제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구산 서낭당은 사계절 관람객이 편리하게 방문해 단오제를 즐기고 있으며 지역관광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서낭당#구산#성황제#서낭제#단오제#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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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권
허균시비
강릉의 대표 문인 허균과 허난설헌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
소개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허균과 허난설헌을 비롯한 허 씨 5문장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 5기가 허균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세워져 있다. 문학 산책로로 조성된 지역 중의 하나다. 허균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하다. 1569년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났으며 허성, 허봉 등 두 명의 형과 누나 허난설헌을 뒀다.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은 허씨 오 문장가로 불리게 되며 오문장가가 남긴 시문은 무료 5천여 수에 달한다.
관광가이드
산세가 흡사 이무기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산 이름을 교산이라고 불렀으며,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스스로 지어 불렀다고 한다. 허균의 시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숲과 대숲은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비 앞에서 허균을 떠올리고 있으면 대숲이 허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마음이 숙연해질 것이다.
관광팁
애일당이 있었던 곳으로 교산 허균이 태어난 집은 정확히 알 수 없고 추정되는 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경포 해변에서 사천 솔숲을 지나 사천 항구 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다 보면 푯말이 보인다. 왼쪽 얕은 언덕길로 올라오면 이정표를 볼 수 있고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내려오면 허균 시비가 보인다. 사천 바닷가에는 허균이 어릴 적 뛰어놀았다는 교문암이 있고 교문암 바로 위쪽에는 뒷섬이 있다. 허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초당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 가면 자세한 허균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접할 수 있다.
#허균#시비#문학#홍길동전#애일당#교산#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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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권
방내리삼층석탑
급격히 줄어드는 2층 이상의 옥신을 지닌 삼층석탑.
소개
방내리 삼층석탑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에 위치해 있는 높이 3.5m의 석탑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단층기단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였다. 초층탑신에는 사방불을 조각했으며 각 면에 양 우주를 모각하였다. 현재 탑이 위치한 곳은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세운 무진사(無盡寺)의 옛터라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확인할 수 없다.
관광가이드
기단부는 분명하지 않으며 탑신부는 작은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옥신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2층 이상의 옥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신라 시대의 승려 자장이 월정사를 창건하면서 불상만 이동시키고 탑은 그대로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석탑의 건축양식으로 봤을 때 고려 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광팁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한 터라 북강릉 나들목에서 나선다. 북강릉 나들목을 나서서 한참을 나오면 큰 도로와 마주치는데 바로 경상도에서부터 올라오는 7번 국도가 된다. 고성 방향, 즉 북쪽으로 길을 잡아 대략 3km를 가면 연곡면 사무소 방향이다. 연곡면 사무소 앞의 영진리에서 6번 도로를 타고 내륙 방향으로 이동한다. 6번 도로를 계속 이용하면 진부에 도달한다.
#고려#석탑#무진사(無盡寺)#신라#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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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보광리석조여래좌상
대좌와 광배를 갖춘 석조여래좌상
소개
보광리 석조여래좌상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높이 1.7m의 석불이다. 1992년 6월 10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좌와 광배를 갖춘 석조여래좌상이며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옛 절터에 있다. 토지 소유자인 이순선에 의하면 약 50여 년 전 이 지역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광가이드
보광리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문양이 우수해 눈길을 끈다. 화강암으로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으나 광배 윗부분이 약간 파손되었다. 나발(螺髮)은 마멸된 곳이 많고 육계(살상투)가 크며 두 귀는 긴 편이다. 결가부좌를 하였고, 법의(法衣)는 주름이 선명한 우견편단(右絹偏袒)을 걸쳤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안 지역에는 3단 대좌를 갖춘 불상의 현존 예가 드물어 양양 서림리 사지 석불과 함께 3단 대좌를 전형적으로 갖춘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관광팁
보주형(寶珠形)의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구별되고, 그 사이는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장자리는 화염무늬〔火焰文〕로 장식되었고, 뒷면에는 명문(銘文)의 흔적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다. 대좌는 하대 하반부가 매몰되었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 면에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아랫면에 2단의 받침이 있다. 상대석과 하대석은 연꽃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광리#석조여래좌상#대좌#광배#사찰#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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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보광리분청자요지
강원도의 유일한 분청사기 가마터
소개
1994년 9월 23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 으로 지정되었다. 강원특별자치도 지역에서 발견된 가마터 중 분청사기 가마터로는 유일하다. 성산면 보광리의 명주군 왕릉(溟州郡王陵:강원기념물 12)에서 서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에 자리 잡은 베리 안 마을 입구의 구릉지 가운데에 있다. 현재 가마가 매장되어 있을 만한 장소는 흙의 색깔이 다른 곳보다 붉다. 가마의 규모는 약 1.4×20m로 추정된다.
관광가이드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남동쪽 하단 경사면은 거의 유실되어 유구층(遺構層)이 노출되어 있고, 주변 일대에는 수많은 청자·분청사기 조각·도침(陶枕:도자기를 구울 때 그릇을 괴는 물건) 들이 흩어져 있다. 수습된 조각들은 대접과 접시 종류가 대부분이다.
관광팁
그릇 안쪽에 흑상감 된 연당초문 대접과 분청인화국화문 접시, 분청인화연판문 대접 등이 있고 약간의 백자 조각들도 함께 수습되었다. 수습된 도자기 조각의 문양으로 볼 때 대체로 13∼15세기 전반의 분청사기 가마터로 추정된다.
#보광리분청자요지#강원도기념물#가마터#분청사기#유구층(遺構層)#청자#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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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권
최선평가옥
ㅁ자형이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고가
소개
최선평가옥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 1리에 있는 옛집이다. 1985년 1월 17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ㅁ자집 형태로서, 안채와 사랑채는 팔작지붕이고, 그 외는 맞배지붕으로 되었다. 자연석 기단 위에 화강암을 이용하여 사다리꼴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올린 장혀수장 집이다. 현재는 부엌을 입식으로 개량했으며 방을 확장했다. 강원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관광가이드
안채는 앞면 4칸과 옆면 2칸 규모를 지니고 있다. 오른쪽에는 부엌을 배치하고 그 앞으로 창고와 외양간을 한 단 낮게 달아 지었다. 사랑채의 왼쪽 대청은 우물마루 바닥에 벽은 판벽이며, 천장은 눈썹 천장이다. 창호는 굽 널 네 짝 세살문이 앞면에 두 짝 달렸고, 측면에는 골판창이 있다. 창호 아래에는 머름 대를 둘렀다. 방의 왼쪽 천장에 개폐 가능한 환기창이 달려 있다.
관광팁
방과 방 사이에는 두 짝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앞으로 세살문과 미닫이문의 이 중문으로 되어 있다. 장혀 때문에 측면이 노출되어 있으므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비바람을 피하게 하였다. 사랑채의 중간 기둥에만 보아지를 달아 놓았으며, 장혀 윗부분에는 완자형 궁판을 두어 구조적 미의 효과를 더했다. 퇴청의 끝부분은 판벽으로 처리하여 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최선평가옥#주문진읍#옛집#창호#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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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옥계권
산계리3층석탑
산계리 절터 무너진 석탑 재를 모아 놓은 3층 석탑
소개
산계리 3층 석탑은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절터에 무너진 석탑 재를 모아 놓은 3층 석탑이다. 양식을 보아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탑 부근에서 잿더미가 많이 나와 옛 절터로 추측하고 있다. 가장 하단부에서 탑을 받치는 기단부는 한 면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라져 보수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마모가 많이 되었지만 가장 상층부는 본래의 모습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
관광가이드
강릉의 옥계를 지나 대관령에 오르다 보면 산계리의 계곡 길이 나온다.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매우 긴 계곡 길을 오르다 보면 도로가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지점의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산계리 3층 석탑이 특유의 검고 투박한 모습으로 맞이해준다. 마모가 많고 변형이 커 옛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산계리 3층 석탑을 보고 있으면 오랜 세월을 견뎌온 모습에서 지난 시간의 아픔이 느껴진다.
관광팁
산계리 3층 석탑이 있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는 강릉에서 옥계로 내려가 다시 대관령 방향으로 산길을 올라야 도착할 수 있다. 빙 둘러 가는 길인 만큼 시간도 적잖게 소요된다. 와룡 계곡과 쉰 길 폭포, 옥계굴, 옥계 해수욕장 등 인근의 관광지와 함께한다면 오고 가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산계리 3층 석탑을 보러 간다면 주변의 관광지를 함께 조사하고 갈 것을 추천한다.
#산계리#고려#석탑#세월#문화#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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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사모정공원
사모정공원은 효와 사랑이 인간의 근본임을 강조하며 조성되었다.
소개
사모정공원은 효와 사랑이 인간의 근본임을 강조하며 조성되었다. 사모정과 효공원은 어머니와 옛 고향 마을을 기리는 정서가 담겨있다. 사모정 정자는 아름답고 고풍스럽게 조성되어 격조있는 모습을 드러내며, 효공원은 문화 공간으로서 드높은 격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강릉지역의 인물인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학문·예술성·효행을 소개하면서 효행의 세계화를 위한 발원지로서 위상을 펼쳐내고 있다.
관광가이드
효공원의 남쪽 공간은 사모정과 시비들과 조각상이 배치되었고, 북쪽 가장자리에는 ‘효향 강릉’ 사람들의 효행을 선양하는 석화와 시비들이 병풍처럼 세워져 있고, 특히 이 지방의 인물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선행을 기리는 안내문이 돌에 새겨져 있다. 공원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모정탑 2기가 세워졌다.